잔혹 동화 같은 실화
소녀는 바다로 도망쳤다
……아니, 버려졌다
4일, 96시간.
인간이 물 없이 살 수 있는 최장 기간,
그리고 11세 소녀가 바다 한가운데서 죽음과 싸우며 홀로 보낸 시간.
1961년 11월, 듀퍼라울트 가족 다섯 명은 요트를 빌려 여행을 떠났다. 쌍돛대가 달린 새하얀 블루벨 호를 타고, 전쟁영웅 하비 선장과 그의 아내 덴의 도움을 받아 일주일간의 항해를 시작했다. 처음 며칠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찬란하게 빛나는 바다와 사랑스런 가족들, 믿을만한 선장. 하지만 5일째 되던 밤, 블루벨 호는 침몰했고 다음날 아침 하비 선장만이 구조되었다.
하비 선장은 돌풍 때문에 돛이 부서지면서 배가 침몰했고, 자신 외의 생존자는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런데 그는 아내를 잃은 남자라고 하기에는 너무 침착했고, 선장으로서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듯했다. 또한 그의 진술은 앞뒤가 조금씩 어긋났다. 그러나 그는 국가적 전쟁영웅이었다. 확실한 증거도 없는 상태에서 그를 의심할 이유가 없었다. 모두 사망했으리라는 그의 진술 때문에 구조 작업도 빠르게 마감되었다.
사건 발생 4일째, 또 다른 생존자가 발견되었다. 11세 소녀 테리 조. 아주 우연히, 지나가던 배의 선원이 그저 바다를 응시하다 발견한 어린 소녀였다. 살아날 가능성이라곤 전혀 없던 소녀가 우연히 구조된 이 기적 같은 이야기에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 미국민 전체의 관심을 주목시키는 사건이 일어났다. 다음 날 하비 선장이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전쟁영웅의 죽음, 원인 모를 블루벨 호의 침몰. 이제 사람들의 시선은 최후의 생존자 ‘테리 조’에게로 집중되었다. 소녀는 블루벨 호 사건의 진실을 알고 있을까.
소녀의 인생을 다룬 한 편의 다큐멘터리
이 책은 실화를 바탕으로 쓰인 소설이 아니다. 온전한 실화다. 하지만 실화라는 이야기를 듣기 전에는 한 편의 미스터리 소설 같다. 저자는 블루벨 호 사건에서 살아남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술한다. 사고가 발생하고, 첫 번째 생존자 하비 선장의 진술을 듣다가, 또 다른 생존자 테리 조의 구조 소식을 보여준다. 철저하게 객관적인 시선을 따라가기에 사건은 더 미스터리하고, 당시 미국민들이 느꼈을 궁금증과 호기심, 당혹감을 함께 느낄 수 있다.
참사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을 연구하는 리처드 로건 박사는 생존자, 사건 관계자와의 인터뷰 및 다양한 자료 조사 등을 통해 이 책을 완성했다. 하지만 단지 사실을 밝히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블루벨 호 사건을 50년 만에 철저히 밝힌 이 책은 사건의 축이 되는 테리 조의 인생과, 하비 선장의 인생을 아울러 보여준다. ‘사실’ 그 자체가 갖는 묵직한 현실감, 찬란한 낮에서 공포의 밤으로 전환되는 과정은 독자를 사건 속으로 빨아들이고, 이후 전개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가슴 찡한 슬픔과 공감을 자아낸다.
하비 선장의 영웅적 모습과 정반대의 모습을 다루는 ‘영웅의 가면’을 읽고 나면 그때까지 느꼈던 감정과는 또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생존 이후에 테리 조가 겪은 상실감, 심리적 고통, 관계의 어려움을 해결해가는 모습에서는 단지 생존자가 아닌 한 여자, 한 사람의 인생에서 끌어올린 참 용기와 의지를 느낄 수 있다. 이 책은 다큐멘터리, 진짜 이야기에서만 느낄 수 있는 눈 밑 발간 감동을 남긴다.